내가 죽인 소녀하라 료 지음, 권일영 옮김/비채 |
하드보일드를 좋아하는 편은 아니지만 하라 료의 소설은 유독 끌린다. 전작인 <그리고 밤은 되살아난다>도 그렇고, 이번에 새로 나온 <내가 죽인 소녀>도 그렇고, 하드보일드라는 장르가 본래 그런 것인지 아니면 이것이 하라 료 스타일인지 아직까지 확신하지는 못하겠지만, 그의 글에는-여타 추리소설에 필요악으로 존재하는-'논리적 비약'이 없다. 탐정 사와자키는 모든 것에 무감동한 태도를 취하며 착실하게 발로 뛰어 단서를 모은다. 이것 후 저것, 저것 후 또 다른 것 하는 식으로 차근차근 움직인다. 1인칭 서술이면서도 그의 심리 상황은 그렇게 자세히 묘사되어 있는 편이 아닌데, 아마도 그렇게 가려진 사와자키의 마음 속에는 '할 일 리스트'가 차곡차곡 순서를 매겨 쌓여 있는 것이 아닐까 싶다. (물론 그러는 도중 예상치 못한 돌발상황이 벌어질 경우의 타격은 다소 즉흥적으로 움직이는 탐정들보다 몇 배 크게 받는다는 것이 문제지만) 사와자키는 유괴된 소녀를 찾아달라는 의뢰 전화를 받은 후 의뢰인의 집에 찾아갔다가 다짜고짜 유괴범 취급을 당하고 경찰에 끌려가게 된다. 유괴된 소녀의 이름은 마카베 사야카, 나이 11세, 특기사항 천재 바이올리니스트. 어느 날 저녁 레슨을 받기 위해 집을 나선 후 연락두절, 그리고 유괴범으로 추정되는 괴한에게서 6천만 엔을 요구하는 전화가 걸려왔다. 유괴범이라는 누명은 풀렸지만, 심지어 그 유괴범들에게서 몸값 운반책으로 지정당한 사와자키는 돈가방을 들고 유괴범들의 요구에 따라 이리저리 끌려다니다가(x개 훈련...-_ㅠ) 건달들에게 두들겨 맞고 기절한다. 깨어났을 때는 이미 게임 오버, 소녀의 생사는 불명 상태로 빠진다. 사실 바이올리니스트 소녀가 등장한다고 해서 음악 이야기가 주를 이룰까 기대했었는데 그건 아니었다. '업계' 이야기가 종종 등장하긴 했지만 역시 큰 비중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사와자키가 추적하는 것은 당연하지만 소녀를 죽일 만한 동기와 알리바이가 있는 인물인데, 이 인물을 찾기 위해서 인물 A → 그 지인 B → 그 지인의 지인 C → … 하는 식으로 차근차근 찾아가기 때문에 잠깐 정신줄을 놓고 읽다 보면 지금 사와자키 앞에서 지껄여대고 있는 사람이 대체 누구랑 어떤 관계가 있는지 헷갈리기 쉽다;; (게다가 작가도 불친절한 편이라 그렇게 설명을 자세히 해 주는 편도 아니다) 물론 그렇게 방사형으로 뻗어나가 마침내 도달한 인물이 '주인공의 숙모의 동창생의 여동생의 삼촌' 정도로 복잡한 인간관계가 되어가는 모양새를 보는 것도 재미가 있긴 한데…. 개인적으론 당 사건보다는 탐정 사와자키 주변의 사람들을 보는 것이 더 즐거웠다. 경찰의 돈과 야쿠자의 마약을 챙겨 토낀 후 가끔 종이비행기로 소식을 전해 오는 옛 파트너 와타나베, 사와자키를 언제나 아니꼬운 눈으로 쳐다보긴 하지만 아주 사이가 나쁜 것 같지만도 않은 경찰 니시고리 경부, 와타나베에게 마약을 털린 후 사와자키를 꽤 괴롭혀 댔지만 역시 아주 싫어하는 것 같지만도 않은(이 '같지만도 않은'의 미묘함이 포인트...ㆀ) 야쿠자 조직의 젊은 간부 하시즈메 및 덩치는 커다랗지만 의외로 마음은 여린 듯한 그 수하 사가라 등. 특히 하시즈메는 이번 권에서 딱히 활약은 없이 떡밥만 뿌리고 사라졌는데 앞으로 어떤 일을 벌이려고 그러는지...ㅎㅎ '충격적인 결말'이나 '일본 미스터리의 새로운 지평'이라는 카피 문구가 표지에 쓰여 있는데 사실 이 정도의 반전은 요새 워낙 많이 쓰여서, 내성이 생긴 나는 끄떡도 없다.; (그보다 그런 건 띠지에 써 주지...) 하기사 89년도 작품이니까 반전이 낡은 건 할 수 없지만... 그래도, 차라리 나오키상 수상 문구를 더 커다랗게 써 주지;; 표지 디자인에 대해서는 워낙 우아하고 멋져서 달리 할 말이 없으므로, 사소한 불평 몇 가지만 끄적여 본다. =ㅅ= 그나저나 다음 권 제목이 <안녕 긴 잠이여>라니 너무 챈들러잖아 ㅋㅋㅋ +) 문득 내가 챈들러보다 하라 료를 더 스무스하게 받아들일 수 있었던 이유 하나를 깨달았다. 하라 료 글에는 하드보일드라면 암묵적으로 바닥에 깔고 시작하는 마초이즘이 별로 없다. 오히려 탐정이 너무 굴러서 폼 잡을 틈도 없으며, 너무 생고생하는 통에 딱하다는 생각까지 들 정도;; |
http://ichiyah.egloos.com2009-07-03T16:07:4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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